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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loved

                                                                            

                                                        Written by. 랜스키.

 

 

 

1.    

이치마츠에게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아니, 비밀 공간이라고 칭하기엔 허술했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콧속과 목구멍을 간질이는 텁텁한 먼지와 퀴퀴한 냄새, 잔뜩 쌓여있는 커다란 상자들. 딱 봐도 사용한 지 오래된 곳이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예부실 한구석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동아리 선배는 연극부가 사용하는 창고라고 대답했다. 원래 문예부와 연극부와 벽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연극부의 연습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일부러 벽을 하나 더 세워 방을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는 소품들을 보관하는 장소라고.

 

이치마츠가 여러 차례 기웃거렸지만,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배 말대로 연극부조차 찾지 않는 듯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이치마츠는 그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어둡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곳. 마츠노 이치마츠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동아리 활동이 없는 날에도 이치마츠는 꼬박꼬박 그곳을 찾았다.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본래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아쿨리나. 오― 나의 소중한 아쿨리나. ]

 


벽 너머로 들려오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잔뜩 힘을 준 목소리는 언뜻 다른 이처럼 들리긴 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이어 힘찬 음성이 울렸다. 미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는 뱉은 이치마츠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솜털 하나하나가 삐쭉 선 느낌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츠노 카라마츠였다. 자신의 또 다른 형제이자 둘째 형. 그는 연극부 소속이었다. 이치마츠는 잠시 멈추었던 펜을 움직였다. 이치마츠의 숨소리와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 이질적인 여러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유독 카라마츠의 대사만 또렷하게 들렸다. 하긴 그 녀석 목소리 하나는 멋지지.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내뱉지 않을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부답게, 창고 안에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 버려진 책상은 현재 이치마츠의 지정석으로 쓰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불도 들어왔다. 가끔 불안하게 깜빡이긴 했지만, 아직 별문제 없었다. 쾨쾨한 먼지 냄새는 단 하나뿐인 작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벽이 얇은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카라마츠의 연극 연습 소리를 BGM 삼아 글을 쓰는 것. 이치마츠만의 방과 후의 낙이었다.

 

이치마츠는 문예부였다. 어둠마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예상외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했다. 어릴 적부터 독서와 작문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치마츠는 손쉽게 문예부의 에이스가 되었다. 정작 당사자는 문예부의 뜨는 별이라는 별명이 낯간지럽다며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벌써 1년도 넘은 일. 질색하던 이치마츠도 체념했을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맞은 2학년 가을, 학교는 축제를 맞아 붕 들뜬 분위기였다. 카라마츠를 포함한 연극부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연극부실에서 살았다. 문예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년처럼 다양한 행사를 준비한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치마츠는 문예부의 대표로 뽑혀 작품 전시를 위해 시를 적어야 했고, 배포할 문집에 실을 글도 써야 했다. 다른 부원보다 배로 바빴지만, 이치마츠는 손이 빠른 편이었기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엔 좀 다르지만.

 

이치마츠는 써 내린 두어 문장을 휙휙 그었다. 까만 볼펜 자국으로 인해 글자가 가려졌다. 답답함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전혀 어떻게 해야 감을 못 잡겠어. 볼펜 꽁지를 잘근 깨물었다. 마감까지 겨우 사흘밖에 남지 않았건만. 뒤엉킨 머리를 잔뜩 흩뜨렸다.

 

시는 습작 중에 무난한 것을 골라 제출했다. 문제는 문집에 실을 글이었다. 주제는 첫사랑. 흔한 주제임에도 이치마츠는 어떠한 주제보다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주 병신 같게도, 지금 첫사랑을 겪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것도 친형을.

 


[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당장 글을 가르쳐 주마. ]

 


멍청아, 너 때문에 글을 못 적고 있거든. 벽 너머의 카라마츠의 대사에 괜스레 속이 뒤집혀 외쳤다.

 


[ 물론이지, 귀염둥이 아가씨. 지금 당장 시작하자꾸나. ]

 

 


이치마츠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저딴 소리를 내뱉는 카라마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치마츠는 입술을 깨물며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멋도 모르게 쿵쾅거렸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아주 세차게.

 

이번 축제에서는 단막극 여러 개를 공연한다고 했었나. 한 연극의 남주인공을 맡았다며 들떠서 방방 뛰어다니던 카라마츠가 떠올랐다. 총 1시간. 그중에서도 카라마츠는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등장했지만, 이치마츠에게는 아주 길게만 느껴졌다. 하필 사랑에 관련된 연극이라 그런지 모든 대사가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하지만 더 웃긴 것은, 카라마츠가 제 앞에서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지껄여줬으면 하는 자신이었다.

 

사랑한다, 이치마츠. 그렇게 카라마츠가 귓가에 속삭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백, 수천 번도 더 상상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동성을, 그것도 형제를 좋아할 확률은 아주 낮았다. 제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걸 알면서도 카라마츠를 향한 감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작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커져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있긴 하지만. 울먹이는 카라마츠의 얼굴이 붕 떠올랐다. 이치마츠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외려 자신의 성벽을 깨달은 것 같아 한쪽 구석이 켕겼다.

 

 


[ 사랑스런 아쿨리나― ]

 


사랑하는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눈을 깜빡였다. 반짝이던 전구가 달깍 하고 꺼지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좋아해'

'카라마츠'

'사랑해'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공간이었지만, 이치마츠는 누가 볼세라 두 팔로 공책 위를 덮었다. 귓불은 물론이고 뒷덜미까지 화끈했다. 조심스레 팔을 풀었다. 손에 힘을 가득 주고 꾹꾹 눌러 담아 한 자 한 자 지웠다. 찢어버릴까하는 생각마저 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지우던 손길도 멈췄다. B5 사이즈 가득 쓰인 글자들을 지울 수가 없었다. 힘들고 귀찮다는 이유를 덧붙였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라 껄끄러웠다.

 

어차피 이 공책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치마츠는 애써 합리화했다. 오돌토돌한 글씨 위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미처 마르지 않은 볼펜 자국이 손에 새카맣게 묻었다. 도드라진 종이와 검은 자국. 마치 자신과 카라마츠의 사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의자를 뒤로 빼서 벽에 기대었다. 역할이 끝났는지 카라마츠의 목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대사들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오직 카라마츠만이 또렷하게 와 닿았다. 이치마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젯밤,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잡느라고 늦게 잤더니, 피곤이 이제야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옅은 햇살 한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자자. 이치마츠는 눈을 감았다.

 

 

 

2.

 

 

 


 "좋아해."

 


티가 날 정도로 떨리는 말 위에 하얀 벚꽃 잎이 내려앉았다. 바람결 따라 쏟아지는 꽃 비 사이로 카라마츠가 보였다. 눈물인지 꽃잎인지 모를 것이 눈을 가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너는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당황했어? 아니면 혐오스러워? 그것도 아니면… 더 생각했다간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이 버석 말랐다.

 

속이 타들어 가는 저와 다르게 카라마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심지 끝에 불이 붙은 것처럼 초조함이 타들어 간다.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카라마츠의 입술이 달싹였다. 입이 열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바닥을 울리기 전까지의 상황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나도."

 

 


느리게 가던 시간이 멈췄다.

 

 


 "나도 좋아한다. 이치마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카라마츠와 한 발자국 남짓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제야 카라마츠의 얼굴이 확연하게 보였다. 부끄럽다는 듯,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젠가 악몽을 꾼 적 있었다. 카라마츠가 내 감정을 알게 되었던 어느 날, 뻗었던 내 손을 무참히 쳐냈다. ?현실이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차가웠던 시선을 아직 잊지 못한다. 지금 떠올려도 심장이 덜컥 멈출 정도였다.

 

 


"이것도 꿈인가?"


 "꿈이 아니다."

 


작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도 들었는지, 고개를 절레 흔들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정말로? 이치마츠의 불신 어린 눈동자에도 카라마츠는 말갛게 웃었다.

 


 "꿈이라도, 믿어줘."

 


나는 이치마츠를 좋아한다. 카라마츠는 떨리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그래. 마츠노 카라마츠는 이런 사람이지. 형제들, 특히나 동생들에게는 더욱 상냥하고 무른, 바보 같은 쿠소마츠. 비록 형제애에서 나온 사랑일지라도, 이치마츠는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군이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에나 맞잡았던 카라마츠의 손은 여전히 따스했다. 전해져오는 온기에 이치마츠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사랑하는 카라마츠."

 


항상 그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말. 카라마츠는 환하게 웃었다.   
 

 

 


 3.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간지러웠다. 살짝 도리질을 치자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뭐야. 슬쩍 눈을 떴다 감았다. 뭐야, 카라마츠잖…

 

카라마츠!? 이치마츠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감각에 벌떡 일어났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의자가 쿠당탕 넘어졌다.

 


"오우― 일어났는가?"

 


카라마츠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마치 복도에서 우연으로 마주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치마츠는 정신이 없었다. 역시 꿈이었나.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허탈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지금은 가을이 지나간 초겨울이다. 벚꽃은 당연히 없겠지. 이치마츠는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혼자 주억거렸다.

 

불 꺼진 방은 어두웠다. 카라마츠 말로는 전기가 나갔다고 한다. 애초에 카라마츠에게 들켰을 때부터 이곳에 있는 것은 무리였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겼다. 팔을 천장을 향해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닫힌 창문 너머의 하늘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 잤는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주섬주섬 공책을 챙기다가 멈칫했다. 손에는 파란색 표지의 작문 공책이 들려있었다.

 

도저히 써지지 않는 글. 첫사랑. 마감. 하얀 종이. 검은 글씨. 카라마츠.

 

헉? 이치마츠는 숨을 들이켰다. 두리번거리던 카라마츠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몇 시간을 붙잡아도 깨끗했던 원고지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황급히 아까의 페이지를 폈다. 새카만 고백들이 너울거렸다. 카라마츠가 지척에 다가오자, 이치마츠는 재빨리 공책을 덮었다.

 

 


"너, 너 봤냐?"

"뭘 말인가, 브라더?"

"안에 내용 봤냐고!"

 


소리가 빽 울렸다. 당황한 티가 역력하게 나는 이치마츠의 외침에 카라마츠는 손사래를 쳤다.

 


"남의 프라이버시는 보지 않는 것이 도리다."

 


이치마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믿지는 못하겠는지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되물었다.

 


"정말 안 봤냐?"

"훗― 이 몸은 사랑하는 브라더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언제나처럼 면박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건만 턱 하니 막혔다. 사랑하는. 형용사가 목구멍을 타고 또르륵 굴러갔다. 사랑하는 이치마츠. 어디선가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설마 지금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이치마츠는 울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 공간을 나섰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카라마츠는 나오지 않았다.

 


"오― 문예부실도 연결되어 있군."

 


뒤를 돌아보자, 카라마츠는 어느새 가방까지 멘 상태로 문밖에 서 있었다. 역시나 연극부실과도 이어져 있었구나. 문예부가 아니라 연극부 소유의 공간이었으니 당연했다. 애초에 문예부실과 왜 연결이 되어있는지 의문이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소소한 낙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지루한 생활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간이었다. 다시는 카라마츠의 연기를 듣지 못하겠지. 그 생각까지 미치자 두통이 일어났다. 지끈거림에 눈을 꾹 감았다. 어디 아프냐는 카라마츠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가방에 공책과 펜을 챙겨 넣고 카라마츠를 지나쳤다. 명백한 무시임에도 카라마츠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치마츠의 옆에 섰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숙였다. 나란한 걸음. 일정한 박자. 저에게도 카라마츠에게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괜스레 목이 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근데 너 나한테 뭐했냐?"

"으응?"

 


이치마츠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카라마츠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계속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이치마츠를 보고 알아차렸는지 감탄사를 내뱉는다. 카라마츠는 팔짱을 낀 채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훗― 웃는 소리가 오늘따라 기분 나쁘다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나는…"

 


나는?

 


"이치마츠가 침을 흘리고 있길래 닦아준 것뿐이다."

 


긴장이 탁 풀렸다. 젠장. 얼굴을 붉힌 이치마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카라마츠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 아프다, 브라더!"

 


다리를 부여잡고 찡찡거리는 카라마츠를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모퉁이를 돌아선 이치마츠는 멈춰 섰다. 헐렁한 가방끈이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대체 난 뭘 기대했던 거냐. 조금 벅찬 숨을 몰아쉬었다. 저 녀석이 쓸데없는 말을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치마츠는 뒤통수로 벽을 가볍게 여러 번 찧었다. 알싸한 고통이 머리부터 손끝, 발끝까지 내려간다.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너무 과민반응한 자신이 싫었다.

 

째깍.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환청이 들린다. 부끄러움이 사그라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음에도, 카라마츠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안 와, 이 멍청이는. 화끈한 얼굴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나저나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깨어났을 때만 해도 생생하게 떠올랐는데, 지금은 누군가가 쓱싹 지워낸 것처럼 깜깜했다. 행복한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치마츠는 입술 끝을 가볍게 쓸었다. 입술에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4.  

이치마츠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카라마츠는 울상인 얼굴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정강이가 아프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신 심호흡을 내뱉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거짓말을 뱉는 것은 힘들다 못해 버거웠다. 체한 것처럼 명치 쪽이 묵직했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아까의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이치마츠의 공책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나의 행동 또한 모두 거짓.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연극 소품이 필요해서 들어갔던 창고. 창문이 열려 있어 닫으러 간 곳에 이치마츠가 있었다. 놀라서 헛것을 본 줄 알았지만, 팔랑거리는 공책과 또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는 펜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시켰다.

 

찬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굳게 닫았다. 위태롭게 깜빡이던 불이 꺼졌다. 스위치를 만져도 도저히 켜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노을빛에 의지해 자는 이치마츠를 빤히 쳐다봤다. 눈 밑에 거뭇하게 다크써클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글이 안 써진다고 했던가. 어제도 밤늦게까지 쓰고 있었지. 눈가를 엄지로 쓸어내렸다.

 

이치마츠의 공책에 손을 뻗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글을 좋아했다. 사춘기가 오고 나서부터 도통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는 이치마츠에게 심통이 나서 반사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확실히 중학생 때보다 문장이 깔끔하군. 내용도 매끄럽고. 그나저나 온통 사랑 이야기뿐이군. 천천히 넘겨보던 카라마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좋아하는 이라도 생겼나 보지. 입안이 씁쓸했다. 카라마츠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카라마츠. 좋아해. 사랑해.

 

낙서처럼 잔뜩 휘갈겨진 이치마츠의 진심. 댐이 무너진 것처럼 넘실거리던 감정이 터졌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종이 끝자락을 잡은 손이 한없이 떨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치마츠가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달라진 말과 행동들. 좋아하는 이에게 받는 냉대는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기 충분했다. 막혔던 숨이 편안하게 터졌다.

 


"이치마츠는 정말 나쁜 아이로군."

 

 


원망이 깃든 말이 흘러나왔다. 이치마츠는 멋도 모르고 여전히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카라마츠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먼지 묻은 손을 교복에 대충 닦아내고 공책 표지를 덮었다. 바람에 넘어갔다고 하면 되겠지. 완벽한 변명이라고 생각하며 카라마츠는 웃었다.

 

 


"카, 라…"

 


일어난 건가? 카라마츠는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잠꼬대였는지, 이치마츠의 두 눈은 단단히 닫혀있었다. 버석한 입술이 달싹거린다. 꿈에서 내가 나온 건가. 이치마츠의 진심을 알게 되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서운함만이 가득했는데. 머쓱함에 뒷덜미를 가볍게 주물렀다.

 

 


"─"

 


웅얼거림에 카라마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앞을 서성이더니 이내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꿇었다. 갈팡질팡 오가던 눈동자에 단호함이 서렸다. 조심스레 다가가 고른 숨을 뱉는 입술 위를 포갰다. 까칠하지만 따뜻하다. 좋아하는 이와의 입맞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비록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해도. 카라마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이치마츠에게 맞은 정강이가 살짝 아려와 미간을 찌푸렸다. 모퉁이 너머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보였다. 역시 상냥하다니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카라마츠는 발소리를 죽였다.

 

힘없이 주저앉아있는 이치마츠에게 손을 뻗었다. 반쯤 감긴 시선이 제 손끝을 타고 올라와 눈을 마주한다.

 


"바닥이 차다구, 브라더?"

 

 


시끄러. 쿠소마츠.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잡아온다. 이치마츠는 변하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험해졌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상냥하고 마음 여린 아이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치마츠에게 받았던 상처들을 외면하기엔 지난날이 아까웠다.

 

조금은, 심술부려도 괜찮겠지. 네가 나한테 심통을 부렸던 것처럼. 카라마츠는 우애가 넘치는 좋은 형을 계속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하는 카라마츠.'

 

흰 종이에 그득 채워진 진심을, 잠결에 중얼거렸던 고백을, 네가 나에게 전해줄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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