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박박
Written by. 윤월.
마츠노 이치마츠는 자살하고 싶다고 격하게 생각했다. 원래 나가 뒤지고 싶다던가, 차에 치여 한방에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은 수없이 많이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창피해 죽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치마츠는 제 눈앞에서 조그만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연보라색 노트를 들고 그곳에 쓰여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고 있는 카라마츠가 미웠다. 지금의 창피함으로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진 않았다. 저가 사랑하는 상대를 어찌 험하게 대할 수 있을까. 차라리 노트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노트를 조각조각 내거나 불에 활활 태워버리는 등 어떻게든 노트를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어떤 생각을 하든 지금 아무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저 자신이 밉다는 생각으로 결론이 나왔다.
카라마츠는 그런 이치마츠의 폭풍 같은 마음을 모른 채 이치마츠가 한 글자, 한 글자 곰곰이 생각하며 쓴 노트, 그러니까 대본을 꼼꼼하게 읽고 있었다. 연극에 인생을 판 사람처럼 연극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카라마츠는 원래 연극대본을 걸레 짝이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지만, 자신이 아끼다 못해 대신 죽어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쓴 대본이기에 더욱 꼼꼼히 읽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읽은 문장을 다시 읽기까지 했다.
시간은 한참 흘렀다. 이치마츠는 아직도 왜 자신이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던 노트를 당당하게 거실 한복판에 펼쳐두고 있었는지―멋대로 읽은 카라마츠의 잘못도 있지만 그건 이치마츠에게는 딱히 문제 되지 않았다―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이치마츠는 아직도 자신의 멍청한 실수에 머물러있었다. 열을 셀 동안 카라마츠가 다 읽지 않으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어디든 몸을 던져 죽어버리자고 결심한 이치마츠는 숫자를 팔까지 세고 이제 구를 세려는 순간, 카라마츠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몸을 발작하듯 떨었다.
“이치마츠?”
“어, 어어… 어?”
“괜찮은가? 지금 식은땀이 엄청나게 흐른다만….”
“괘괘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치마츠는 애써 밝지도 않은 제 분위기를 띄우며 카라마츠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었다. 연극부 에이스 앞에서 뭐하는 짓인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라고 자각한 이치마츠는 또다시 속에 수많은 폭풍이 지나갔다. 진짜, 죽고 싶다!
“역시 My brother답군! 문예부에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 사실이었구나!”
“무슨 소리야?”
“말을 안 해줬던가? 이치마츠는 마치 물이 곧은 강을 흐르듯 자연스럽고 수려한 글을 쓴다고!”
카라마츠의 급작스러운 칭찬―정확히 따지자면 카라마츠의 친구―에 이치마츠는 잠시 넋을 놓다가 순간 얼굴이 빨개지더니 식은땀을 폭포처럼 흘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다가 이치마츠의 상태를 보더니 놀라 진정하라며 급하게 손을 잡았다. 그것이 이치마츠에게는 강력한 발화제였으나 여기에서 더 감정이 폭발하면 진짜 몸이 터질 게 분명하다고 자각한 이치마츠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진정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행이라며 옅게 웃었다.
“아무튼 친구의 말이 그대로였군! 이치마츠가 쓴 대본은 그야말로 완벽! Perfect!”
“그렇게 읽었다면 다행이고….”
“그래! 이치마츠! 혹시 이 대본으로 연기를 잠깐 해도 괜찮겠는가?”
카라마츠의 부탁에 이치마츠는 거절하려 했지만, 햇살을 닮은 웃음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승낙에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치마츠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왜 했냐며 자신을 매우 자책했다. 카라마츠는 아까 노트에 적힌 대본을 볼 때처럼 이치마츠의 변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다시 노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연기할 부분을 정했는지 그 부근을 몇 번 웅얼거리며 몇 번 몸짓을 약하게 하더니 벌써 준비가 다 된 것인지 벌떡 일어났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연극을 자신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모자란 선택을 잊어버리자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카라마츠는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이어 카라마츠는 부드러운 몸짓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는 완벽했다. 다른 단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쓴 대본을 보며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귀를 막고 눈을 감거나 아까처럼 뛰쳐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연기자가 카라마츠이기에 애써 연극을 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이른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간의 햇빛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와 카라마츠를 마치 무대 조명처럼 비추고 있었다. 조명에 비친 카라마츠는 아름다웠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흰 양말까지. 모든 것이.
“―”
이치마츠는 여전히 창피함에 반쯤 물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지 카라마츠의 연극에 깊게 잠겨있었다. 이치마츠는 멍하니 카라마츠의 연기를 감상하다가 순간적인 자기혐오에 마음이 아렸다. 제가 쓴 대사에 스스로 죽어버리려 하다니! 이치마츠는 가까스로 울 뻔한 걸 참으며 계속 카라마츠의 연기를 깊게 감상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여전히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
카라마츠의 대사는 젖어있었다. 이치마츠는 일부러 대본 속 인물에게 이입하기 위해, 대사를 살려 단 한 명의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물에 담긴 목소리로 연기한다고 애써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해 진짜 마음을 전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마지막이다. 맨 끝은 카라마츠라고 적었으나 얼마 전, 볼펜으로 박박박 종이가 찢어지라 지운 탓에 지금은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온통 검은 자국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치마츠는 어차피 자신의 마음도 전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 카라마츠의 연기를 중단시키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방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래도. 이런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어?”
카라마츠.
“이치마츠?”
순간 놀란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우뚝 멈춰서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카라마츠는 얼굴이 벌겋게 익은 상태로 이치마츠를 바라보며 울음을 참으려는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웃음을 본 이치마츠는 똑같은 얼굴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마 실수를 한 건 제가 아니라 카라마츠가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