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Written by. 일사.
급하게 터져나온 재채기에 딸려오는 걱정은 누구도 아닌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감기 걸렸어? 나는 손등으로 코를 한 번 문지르고 나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바닥만 쳐다봤다. 잠깐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려고 한 발짝 내딛었을 때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몸을 억지로 돌리는 그에게 인상을 구겼던 것도 잠시, 시야를 반쯤 가리는 두툼한 파란색 털들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 옷을 따듯하게 입었으면 좋았을걸, 이치마츠. 제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두어 바퀴 둘둘 감아낸 그가 바보처럼 마냥 웃었다. 나는 그게 못내 꼴사나워서 손을 떨쳐내고 몸을 도로 돌렸다. 더 추위를 타는 건 그쪽이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덜미를 스쳐 고개를 수그리면서도 차마 목도리를 돌려달란 말은 못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별다른 이유 없는, 의사 피력에 불과했다. 내가 너를 싫어한다는, 그런 거였다.
중학교 내내 귀가부를 고집했던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해 문예부에 든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책을 읽는 게 좋았고, 거기에 가면 눈치 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의 차이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알고 있었다. 그냥, 나 문예부야, 하고 까닭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할 일도 없겠지만. 부활동 시간엔 내내 책만 읽었다. 차라리 도서부를 가지 그랬어. 부원 중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누군가가 물어보면 침묵을 고수했다. 내가 어느 부에 들어가든 내 권리였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자유에 왈가왈부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한 학기가 다 끝나도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그 동안 읽은 책 몇 권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2학기에 들어서고 나서도 전과 다를 바 없이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부장인 3학년의 카지모토 선배가 다가왔다. 부활동에 성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드디어 퇴출이라도 당하는 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선배는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그게 꼭 형제의 누구 같아서 괜히 인상을 썼다.
"부활동은 할만 해?"
"말 안 해도... 아실 텐데요."
그래도 직접 듣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 내 시큰둥한 어조에 기분 상한 티 하나 내지 않는 모습에 저게 연상의 여유라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선배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나는 읽고 있는 책에 다시 눈을 던졌다. 글을 쓰든 말든 내 선택이라는 말에 입부를 결정한 거였으니, 어떻게 하든 내 잘못은 아니었다. 선배는 "무슨 책 읽어?", "아, 그 작가 책 재밌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가 내게서 대화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년 말에는 문집을 내는 게 우리 부의 마지막 활동인데, 마츠노는 어떻게 할 거야?"
"별로..."
"이번 주제는 연극인데. 그러고 보니 마츠노의 쌍둥이 중에 연극부인 애가 있지 않았나. 카라마츠?"
"...아."
난데 없는 이름에 손에 힘이 빠져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과 부딪힌 책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배가 당황해선 상체를 굽혀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표지를 툭툭 털고 반듯하게 내밀어진 걸 받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의아해 하던 선배는 앞에 있던 책상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슬슬 일어났다. 이제 곧 하교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고 이번 달 안으로 얘기해 줘. 천천히 쓰면 되니까."
또 활기찬 웃음을 띄운 선배는 부실을 나갔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활동을 하던 녀석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는 고요해졌다.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가을의 해는 놀랍도록 짧았다. 아니면, 벌써 겨울이 오는 지도 몰랐다.
카라마츠가 내게 고백한 건 올해 초였다. 1월의 끝. 날은 추웠고 나는 감기에 걸려 재채기와 콧물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생처럼 보일 정도로 커다란 더플 코트에(우리 또래 애들은 흔히 떡볶이 코트라고 부르곤 했다) 털모자를 쓰고 고양이가 그려진 귀마개까지 했다. 그런데도 옷을 뚫고 들어오는 찬 바람을 이기지 못해 몸을 떨었다. 카라마츠는 교문 앞에서 몇 번이나 재채기를 하면서 저를 기다리던 나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제 목에 두르고 있던 파란색 목도리를 내 목에 똑같이 둘러줬다. 두툼하고 큼직한 목도리에 내 얼굴은 반쯤 묻혔다. 걱정스레 빨간 볼을 문지르는 카라마츠의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손에 뭔가 따듯한 게 쥐어졌다. 손을 들어 보면 코코아 캔이 거기 있었다.
"이치마츠가 생각나 매점에서 샀는데, 코트 주머니에 넣어 뒀으니까 아마 아직 따듯할 거다."
그 온기는 온전히 코트의 것이라기보단, 카라마츠의 체온에 가까웠다. 나는 양손으로 캔을 꽉 쥐었다. 붉게 물든 손가락 끝이 느리게 녹았다. 조금 간지러워서 눈을 찌푸렸다. 그때까지 나와 카라마츠는 형제 중에서도 퍽 친한 사이였으니까, 카라마츠를 따른 건 오히려 내 쪽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감기에 걸린 것도 그의 농구부 활동이 끝날 때까지 바보처럼 기다렸던 게 그 이유였다. 함께 하교하는 길에 카라마츠는 많은 얘기를 했다. 나만 아는 카라마츠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참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때 카즈유키한테 패스 받고 이 몸이 슛을 넣는데..."
"...농구,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그만 둬?"
"그야... 아니, 음... 연극부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고 있거든. 아카츠카 고교에는 연극부가 있다고 하니까."
"연극부?"
"길티 가이인 나라면 농구부에서든 연극부에서든 주인공이지. 훗, 나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선배들이 눈에 훤하군. 그치? 이치마츠."
연극부라는 한 마디에 며칠 전에 하교하면서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반 친구들 손에 이끌려 연극을 보러 갔는데, 거기 배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었지. 설마 카라마츠가 내 얘기를 듣고 결정해 준 걸까. 물론 아니겠지만. 동경하는 형이 하는 행동의 이유일 지도 모른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표정을 가려주는 목도리에 감사하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캔을 쥔 손에 살짝 힘을 넣었다. 연기하는 카라마츠가 보고 싶어. 오로지 그런 생각 뿐이었다.
"저기, 말이야. 이치마츠."
"응."
"연극부 들어가면, 그러니까... 이치마츠가. 자주, 보러 와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카라마츠의 뺨이 감기로 열이 오른 나보다 붉었다. 안 좋은 예감이 내 머리를 퍽 때렸다. 나는 나보다 훨씬 사교적이고 성격 좋은 카라마츠를 동경했고, 그에 대한 건 대부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다만 그 순간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모르는 카라마츠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마츠."
"어?"
"너 나 좋아해?"
누가 카라마츠에게 불을 지르기라도 한 마냥 그는 확 시뻘게져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눈가가 점점 빨개졌다. 본인도 눈치 챘는지 우왓, 하는 소리를 내더니 옷 소매로 눈을 북북 문질렀다. 열이 들끓던 체온이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카라마츠가 이내 이쪽에 눈을 맞췄다. 나는 훌쩍하고 흘러내린 코를 삼켰다. 동경하던 형이, 그러니까, 동경하는 카라마츠가...
"...응, 좋아해. 이치마츠."
손에 만져지는 캔이 차가웠다. 나는 카라마츠의 앞에서 도망쳤다. 시내를 대충 떠돌다가 밤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갔다. 카라마츠는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까의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의 감정은 뒤죽박죽 뒤섞여서 속이 메스꺼운 빛을 냈다. 나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형을 향한 동경에서도 졸업했다.
나는 거의 어둑어둑해 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부실을 나섰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교문에는 사람이 기대어 서 있었다. 놀랍게도 뒷모습만 보고도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벌겋게 오른 귀 뒤가 퍽이나 안타까웠다. 전처럼 도망가지 않고 천천히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발견한 카라마츠가 주인을 만난 강아지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아마 그에게 귀와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아마도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을 요량인지 우리 사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여기서 뭐해."
"이치마츠를 기다렸다."
"기다려서?"
"기다려서... 글쎄."
코트 주머니에 양 손을 꽂고 시큰둥하게 그를 바라보던 내 볼에 따듯한 게 닿아 왔다. 코코아 캔. 카라마츠의 체온으로 데워진. 연극부가 끝난 지도 한참 되었을 텐데 캔은 거짓말 하나 보탬 없이 따끈따끈 했다. 나는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그러면 카라마츠는 내 주머니 속에 캔을 집어 넣고 제 목에 둘러져 있던 파란 목도리를 내 목에 감았다.
"이치마츠는 고집쟁이로군. 목도리를 하고 다니면 좋을 텐데."
"부에서 문집을 낸대."
"그래? 이치마츠의 이야기를 듣는 건 오랜만이네. 글을 쓸 건가?"
"주제는 연극이라고 하더라. 부장이 네 이름을 말했어."
"흠, 역시 이 몸의 인기는 여전하지."
나는 몇 번이고 콧물을 삼키고 눈을 굴렸다.
"글 같은 거 쓸 생각 없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부에 들었으니까."
카라마츠는 고장난 플레이어처럼 그런가, 그렇겠네, 하고 평이한 말만 뱉었다. 목도리가 단단히 내 목을 두르고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낸 카라마츠가 내 코에서 흐른 콧물을 닦아 냈다. 흐트러진 머리까지 슥슥 정리해주고는 만족스러운 것처럼 웃었다.
"네가 연기하는 연극 따위 볼 생각 없었어."
"그래도 보러 와줬으면 좋겠군."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나는 카라마츠에게 대답하고, 카라마츠도 내게 대답했지만 우리의 대화는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할 말만 성의 없이 뱉어냈다. 나도 나지만 카라마츠도 어지간히 이기적인 놈이라서, 그럼에도 대화가 이어졌다.
"네 이야기를 쓸까. 피 섞인 쓰레기 동생을 좋아하는 쓰레기 형으로."
"이치마츠가 써 준다면 기쁘게 볼게."
이치마츠는 쓰레기가 아니다, 하는 멍청한 말은 무시했다. 과거 동경했던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캔을 데우느라 오래 코트 주머니 안에 있었을 손은 식지 않고 온도를 유지했다. 근 1년 간 내 쪽에서 먼저 카라마츠에게 손을 낸 적은 없었다. 아무리 의연한 카라마츠라도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깍지를 껴서, 내 코트 주머니에 같이 쑤셔 넣었다. 손에서 땀이 찼지만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말해두지만, 나는 너처럼 쓰레기 같은 형 따위 안 좋아하니까."
"...응. 나는 너에 관한 건 전부 알고 있다. 이치마츠."
거짓말쟁이. 하나도 모르면서. 심통 섞인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배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경했던 형이 품은 짝사랑에 심심한 애도를 보냈다. 아마 그 사랑이 이루어질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테다. 아마 다다음 생에서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코코아를 받은 보답일 뿐이라고 스스로 묻고 답했다. 우스운 변명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아, 한심한 꼴이네.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