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소년
Written by. 아피.
이치마츠는 소극적인 아이였다. 소극적이고 상냥했던 탓에 말보다는 생각이 많아 오해를 사기 쉬운 성격이 화를 불러 더더욱 그를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아이는 책상이 있는 방에 혼자서 작은 전등을 켜고 앉아 책을 읽거나 학교에 검사를 받는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의 일기장을 앉은 다리가 저리도록 오래도록 앉아 쓰는 시간을 좋아했다. 일기장이었던 그것은 아무 제목이 붙지 않은 노트가 되어 글씨는 작아지고 두께는 두꺼워졌다. 중학생이 된 무렵까지도 용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혼자 써내려간 이야기가 노트로 50권 가까이 되었다. 집 안에 숨겨두는 것도 한계에 부쳤지만 그렇다고 차마 버릴수도 없었던 이치마츠는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공범자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오소마츠 형이라면 제 이야기가 우스갯거리로 돌아다닐 테지. 그렇다고 동생에게 보여주는 것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쵸로마츠 형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소거법으로 남았던 카라마츠에게 어느날 새벽, 이치마츠는 조용히 그를 자신의 아지트로 불렀다. 아지트라고 해 봤자 벽장 한 구석에 자신의 노트가 박스째 놓여있는 한 평도 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치마츠의 예상보다 훨씬 카라마츠는 기뻐했다. 옛날부터 작은 것에 쉽게 기뻐하고 감동하고, 감화되는 성격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다른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 기뻤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 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의 비밀을 소중히 하기로 한다.
카라마츠가 갖게 된 이치마츠의 비밀은 날이 갈수록 대단한 것이 되었다. 한달에 많으면 노트 분량으로 두세권이 되는 이야기는 항상 누군가가 죽으며 끝났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그로서도 상관 없을 만큼 연약한 펜 끝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엄숙했고 조심스러웠으며 예리한데다 아름다웠다. 카라마츠는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조용히 종이를 채우는 고요한 이치마츠의 옆모습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이치마츠는 문예부에 들었다. 그때까지 둘 만의 비밀 밀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종종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마저 카라마츠에게 처음으로 고하며 이치마츠는 하도 품에 쥐고 다녀 꾸깃해진 부활동 신청서를 내보였고. 그 다음주 카라마츠는 먼지 냄새 나는 벽장 안에서 이치마츠에게 부활동 신청 용지를 보여주었다. 연극부였다. 이치마츠가 쓰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보고 싶어. 카라마츠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이치마츠는 어두운 곳에서 그 종이를 하도 들여다 보느라 뻑뻑해지는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야 했다. 연극부. 그렇게 눈에 띄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던가? 이 이야기를 꼭 대본으로 고쳐 써 줄 수 있겠느냐며,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눈을 빛내며 말하는 카라마츠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여 이치마츠는 낯섬을 느꼈다. 건네주는 자신의 노트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손에 감겨드는 겨우 노트 세 권 짜리 무게를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은 이치마츠는 차마 고개를 젓지 못하고 끄덕였다. 둘 만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말하자는 것 같아 이후로 내내 삼키는 침에 가시가 돋아 목 언저리가 까끌거렸다. 그 주에 처음으로, 이치마츠는 둘 만의 약속장소에 가지 않았다. 으레 새벽녘에 조용히 일어나 벽장 안에 숨어들어가던 두 사람만의 밀회를 그만두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인 것은 자신이면서 그런 제안을 해 온 카라마츠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멈출수가 없었다.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집 안을 견디지 못해 학교의 도서실에 처박혀 이치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 노트에다 베껴썼다. 정의롭고 어리석은 영웅이 나오는 이야기. 신의 변덕으로 신탁과 함께 신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결국엔 명예도 사랑도 잃고 목숨을 잃는 이야기. 신화에서는 흔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의 변덕이나 일방적인 사랑과 압도적인 힘에 끌려다니고는 했다. 카라마츠는 특히나 이 영웅을 마음에 들어 해 벽장에서 만나는 날이면 작은 소리로 달달 외운 대사를 읊고는 했는데, 이치마츠는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둘 만의 세계에서, 그 작은 벽장이 둘만의 무대였으니까.
완성된 대본을 카라마츠에게 넘기면서도 이치마츠는 그걸 말하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소심한 아이였다. 조금 섭섭한 듯 어색한 듯 묘한 얼굴을 한 카라마츠가 고맙다고 말해도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카라마츠의 귀가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문화제 때 발표하게 될 연극으로 카라마츠가 가져간 대본이 뽑힌 데다가 주인공으로 뽑히기까지. 문예부의 문집 만들기 활동으로 느지막하게 학교를 나오다 보면 강당에 불이 환하게 켜진 걸 볼 수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이치마츠가 신발에 들어간 돌을 빼내려고 잠시 교정 아래 멈춰서서 한쪽 발을 들었다. 한참 연습이 절정에 올라 있는지 바깥까지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몇 구절 들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쓴 대사였다. 이치마츠는 애써 시선을 바닥에 꽂은채 강당 문으로 느리게 걸었다. 누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등을 떠미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 ㅡ 하여, 사랑이여! 아, 매정한 신이여. 이 종자의 영혼 반을 내어주신 분! “
배에서부터 이끌어낸 높은데다 공기가 많이 섞여들어가 무겁고도 가벼운 목소리가 강당 끝의 철문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내민 이치마츠에게까지 그 목소리가 닿아 이치마츠는 문을 세게 붙들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하는 그는 체육복 차림에 실내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렇게 훌륭하지도 않은 무대 위에서 엉성한 배경을 뒤에 두고 주먹을 쥔 채 하늘에 대고 오열하는 채였다.
이치마츠는 소름이 끼쳤다. 내가 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눈 앞에서 말하고 숨쉬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신일거다. 죽어있는 그저 종이 쪼가리에다가 눈물과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했어. 쌍둥이 형제에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연기를 그야말로 저주와도 같이 매력적으로 눈 앞에서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느 창작자가 그를 자신의 뮤즈로 삼지 않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찢고 등장인물이 실제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누비는 그를 사랑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이치마츠는 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이치마츠를 발견한 카라마츠의 눈이 무대 아래의 자신의 형제에게 잠시 머물렀지만 오래는 아니었다. 이치마츠에게 지금 생긴 불만이 하나 있다면 연기하는 상대가, 카라마츠가 감정을 퍼붓는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닌 것 뿐이었다.
이치마츠의 세상은 간단하게 뒤집혔다. 이후로 펜을 잡고 노트에 쓰는 이야기라고는 전부 그 날의 그 기억이 남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무대 위가 아니라면 만날 수 없음을 아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가엾은 각본가는 무대의 막이 내릴 때까지만 전력으로 그를 사랑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벽장에서 만나는 대신 빳빳하게 새로 뽑아간 대본을 들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부활동을 쫓았다. 대본을 써 준 각본가라고 말하고 뻔뻔하게도 부활동에 난입했어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이 방금 고쳐 쓰거나 더해 준 대사를 말하며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카라마츠를 보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쓴 단어를 온몸에 두르고 숨쉬는 이가 거기 있었다. 나의 신이고. 나의 영웅이 지금만큼은 그곳에 있었다.
“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 나머지의 영혼은 하데스 님의 품에 들어가겠지만 나머지 반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기에. “
스스로 배에 칼을 찔러넣은 영웅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심장보다 뜨거운 피를 토하며 자신의 히어로가 죽는 것을 이치마츠는 객석 한가운데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문화제 날이 되어 앞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진하게 한 카라마츠는 놀랄 정도로 낯설고 익숙했다. 벽장 속에서 대단하다며 눈을 빛내던 카라마츠의 웃음을 본 일은 언제였더라? 이치마츠는 문득 뒤꼭지가 서늘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들어가며 날 선 아픔을 내린다. 그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붉은 커튼이 무대의 끝까지 덮어 내려가고,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사이를 가로질러 이치마츠는 무대 뒤로 달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울렸다. 방금 전 가슴 한가운데서 난도질 당해 죽은 영웅의 시체를 끌어안고서 자꾸만 아래로 빠지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무대 뒤 대기실에 어렵지 않게 들어간 이치마츠는 막 화장을 지운 제 형과 얼굴을 마주했다.
“ 이치마츠! 무슨 일이지. 날 보러 와 준 건가! “
몇마디 더 나누지 않아도 질리도록 그의 연기를 봐 온 이치마츠는 단번에 알아챘다. 카라마츠는 아직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시선을 모으는 표정을 할 수 있는지, 몸짓을 하는지. 그리고 목소리를 넓혀 내는 무겁고 울리는 목소리 발성까지 전부 무대 위의 그였다. 방금 죽어 넘어졌던 영웅의 것이었다. 이치마츠는 분명히 그가 연기하는 모습을 사랑했지만 이런 형태로는 아니었음에도. 기어이 자신을 죽여 사랑받을 형태로 만들어 온 카라마츠는 역할다운 웃음을 지었다. 정의롭고 약한 것을 돌보고 사랑하는 그는 곧 울며 주저앉는 자신의 동생을 끌어안고 달랠 것이다. 솔직하지 못해 자신에게만 악담을 퍼붓는 동생을 그저 애교로 받아들이며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자신을 언제까지나 필요로 할 것을 알았다. 그 다음 이치마츠가 적은 이야기는 카구야 히메를 닮은 전래동화처럼 순수하게 잔혹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아내를 의심해 여우라며 삽으로 내리쳐 죽인 어리석은 남편은 그제서야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한 아내의 사랑을 깨닫고 운다. 이치마츠는 펜을 내려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