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
Written by. hertz.
[무고]
이치마츠.
갑자기 어깨에 실린 무게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반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래. 너는 아니지만, 날 잡아먹을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지. 바로 옆 반인 내 쌍둥이 형제, 마츠노 카라마츠. 적당히 웃음으로 반 아이를 보내고 버스 정류장 의자 한구석에 걸터앉았다. 하늘은 유난히도 회색 구름이 많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새 학년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은 오월. 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툴툴대긴 했지만 카라마츠 녀석과 등하교를 함께 할 수 있었는데. 2학년이 되자 무슨 바람이 든 건지 그는 갑자기 연극부에 들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그 좋다는 손재주를 써서 꽃꽂이부에나 들어가지 그래, 하는 토도마츠의 비꼬는 듯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유명한 연극의 한 대사를 읊으며 안쓰러울 정도로 눈을 빛냈었다. 정말이지 안쓰러울 정도로, 빛나는 녀석이었다. 마음이 아려올 정도로.작년부터 부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예부에 들고 있던 나는 쵸로마츠에게서 받은 우롱차를 홀짝이며 그런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카라마츠는 왜 내가 따가운 눈빛만 보내고 자신을 때리거나 하지 않는지 꽤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금세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안쓰러운 데다가 눈치도 없는 녀석.
"이러다 비오는 거 아니야?"
"설마, 오늘 일기예보에서 비는 안 온다고 했는데."
"나 우산 안 가져왔단 말이야!"
뒤쪽으로 시끄러운 목소리 몇 개가 흘러지나가 몸을 약간 움츠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카라마츠와 같이 어울리는 우리 반 연극부 아이들이 틀림없었다. 왜 움츠렸냐고 물으면 대답은 절대 못할 테지만.오늘 카라마츠는 저녁 늦게까지 연극부에 남아 연습을 한다고, 오후 7시쯤에나 집에 돌아올 거라고 어젯밤 미리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말해뒀었다. 아직 축제도 한참이나 남아서 여유로울 텐데. 그는 준비성이 철저한 자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성공을 해낼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저녁식사를 굶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한사코 손을 내저었었다.정말 저녁을 굶지는 않을까. 고개를 들어 버스정류장의 지붕을 넘어서 아슬하게 보이는 은행나무 잎들을 바라보다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번에 남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다. 그러니 분명 저녁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 다음에, 혹은 또 그다음에. 쓸데없는 부활동에 치중하느라 저녁을 굶지는 않을까. 가족을 뒤로 하지는 않을까. 나를 전혀 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족을 누구보다는 아끼는 그이니 자신을 내칠 일은 없다고, 양손을 꼭 맞부딪히며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크기가 똑같은 양손. 이게 내 왼손이 아니라, 카라마츠의 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애초부터 누가 누구든 똑같은 여섯 쌍둥이이다 보니 카라마츠의 손에 굳은살이 좀 더 박힌 것 말고는 나와 그의 손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나는 카라마츠와 손을 맞잡기라도 하는 양, 조심스레 양손을 마주 쥐었다. 처음에는 약하게 맞잡은 손에 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점점 힘이 들어가 혹여 누가 본다면 버스정류장에서 중대한 기도라도 올리는 줄 알 것이다.
*
발등 위로 은행잎이 떨어졌다. 아직 노란 기 하나 돌지 않는 연녹빛의 은행잎이었다. 짙은 매연과 함께 버스가 멈춰서는 소음이 밀려올라와 숨을 콜록이며 고개를 들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아이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대부분 빠져나갔지만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아니었다.몸을 반쯤 빼 걸터앉아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한참동안 느긋하게 구경했다. 약간 서늘한 바람에 머리칼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숨을 새로 고르느라 몸을 꽤나 들썩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달라붙어있는 은행잎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쩐지 그 녀석이 생각나는 것 같아, 괜히 발을 털어내 은행잎을 떼어냈다.카라마츠.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그 녀석의 이름을 되뇌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간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 개?"
"주인 없는 떠돌이 개 아니야? 가까이 가면 물 것 같은데..."
"그냥 놔두는 편이 좋지 않아?"
"누가 물리기 전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으려나."
딸랑거리는 소리가 꽤 근처까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나는 그제야 바닥을 구르는 은행잎에 고정하고 있던 눈길을 겨우 들어 사람들 입에 한창 오르내리고 있는 개를 바라봤다. 동네마다 한두 마리 정도는 있을 법한, 약간 털에 때가 탄 갈색 점박이 개. 그 개는 걸고 있는 낡은 목줄에 달린 방울을 딸랑이며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사람들은 개가 혹여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듯 흘끔 흘끔 그 개를 내려다보며 소란을 피웠다. 나는 어쩐지 해를 끼칠만한 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물끄러미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본래 개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좋아하는 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길 잃은 동물을 무시할 만큼 매몰차지는 못했다.어쩌지. 유기견 센터에 신고라도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유기묘 센터가 고양이가 아닌 다른 동물들도 받아주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나가던 나는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로 어깨 위에 올려진 무게감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카라마츠...?"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내가 줄곧 생각하고 있던 나의 둘째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우, 이치마츠. 오늘 연습이 갑자기 취소되어서 말이야. 괜찮다면 같이 돌아가지 않겠나?"
호탕하게 말을 내뱉곤 자연스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그의 모습에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말문이 막혔다. 카라마츠는 마침 신호에 걸려 바로 저편에 멈춰 서 있는 버스를 보곤 운이 좋다며 재잘거렸다. 개는 내가 앉아있는 벤치에서 채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황급히 무단횡단을 하는 아이들을 향한 버스의 경적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신호가 바뀌어 파란 불이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느릿하게 걸어오는 개보다 버스가 먼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라마츠는 개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 혹은 개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곧바로 버스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몇몇 남아있지도 않던 사람들마저 이미 버스에 몸을 실고 있었다.
"이치마츠, 같이 가지 않을 텐가?"
버스의 앞문 위로 발을 올리던 카라마츠는 우물쭈물거리는 나를 뒤돌아보곤 의문이 드는 듯 물었다. 개를 한 번, 카라마츠를 한 번. 그리고 개를 또다시 한 번 되돌아본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젓곤 그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무심한 카라마츠는 발견한 빈자리를 나에게 내주며 형으로서의 일을 해낸 게 뿌듯한 듯이 해사하게 웃었다. 적당히 자리에 몸을 맡기고 창밖을 내다봤다. 길 잃은 개는 여전히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무고한 나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