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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The Stage

                                                                            

                                                        Written by. 꾸냠.

 

 

 

[이치카라] On The Stage

 

 


벚꽃이 진다.
화려하고도 가련하게 흐드러지며 푸른 하늘을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벚꽃이 진다.

- 5월
 만개하는 벚꽃과 함께 펼쳐졌던 다소 서먹하고 낯설어, 마치 살얼음과도 같았던 교정의 모습도 지는 벚꽃비에 녹아내렸다. 아이들은 이제 지는 벚꽃을 바라보기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단 한 두시간이라도 더 깊이 새겨넣고 삼삼오오 짝을 이루기에 바빠졌다. 그런 시기이다.

점심시간, 한 달 간 다져진 얕은 인간관계를 조금이라도 두껍게 다져보고자 아이들이 저마다 소속을 찾아 바쁜 와중에,  이치마츠는 혼자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늘 같았다. 지난 3월 임시 소집일 날 발견한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가로수길.

교정 뒤쪽 - 소각장까지 놓여있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쓰레기 처리장으로 통하는 좁은 길목은 양 옆으로 벚나무가 가득히 심어진 학교 나름의 명소였다. 문제라면 역시 그래봐야 어차피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재수없게 청소당번에 걸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게 아니고서야 아이들은 그 곳을 향하지 않았다.

4월- 막 벚꽃이 피기 시작해 달짝지근한 꽃냄새가 휘적거릴 때라면 또 모를까.
지금처럼 꽃이 져가는 와중에는 코 끝으로 꽃향기가 채 닿기도 전에, 쓰레기장에서 흘러나온 지독한 악취가 먼저 느껴졌다. 더 이상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묘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에 미처 담아두기도 전에 스러져가는 세상, 그리고 그 뒤로 코 끝을 찌르며 들어오는 각종 폐기물의 냄새.

게다가 그 덕에 사람이 별로 오가지 않았고-

“왔군, 이치마츠!”

무엇보다, ‘그녀석’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응. 오늘도 먼저 왔네”

참 신기하기도 한 일이었다. 결코 몇 학년인지도 몇 반인지도 알려주지도 않는 친구.

점심시간 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다급한 발걸음을 옮겨도, 그는 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수길 안 쪽에서 세 번째 벚나무, 갈색의 아기자기한 돌담벽이 회색빛의 시멘트 벽으로 바뀌는 경계에서 둘은 늘 함께 시간을 보냈다.

- 카라마츠.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에서 처음 만난 그는 과장된 말투와 행동거지가 우스꽝스러운 소년이었다. 스스로를 연극부의 에이스라고 소개했지만, 연극부인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아이는 잘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 짤막하게 몇 시간을, 그렇게 함께 보내는 것이 학교에서 보내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늘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걸 가져왔어”

이치마츠가 그렇게 말하며 조그만 도시락통 아래 쟁반처럼 받쳐온 책 한 권을 펴들었다.
『인간실격』 , 낡은 하드커버 표지 여기저기에 얼룩이 진 것이 꽤 험하게 굴려져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깨끗하게 보관된 책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그걸 차마 흙바닥에 놓고싶지는 않았는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모양이었다.

 

“유명한 책이군.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지만 나도 알고있다”
“난 이 작가가 좋아”

이치마츠가 손 끝으로 하드커버 위에 찍혀있는 작가의 이름을 문지르며 작게 말했다.

 

-문예부원 이치마츠.
하지만 부원은 한 명 뿐이었다. 선배들이 몇인가 소속돼 있었지만, 고3이기도 하고 애초에 유령 동아리나 마찬가지인 상태라고들 했다. 다들 그저 혼자 조용히 책읽는 것이 좋아서 들어오는 것일 뿐, 이치마츠러럼 정말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연구라든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언가를 쓰고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적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 정말 글을 쓸 생각이 있는 녀석들은 이미 뭔가를 쓰고있었고, 학교 동아리같이 답답하고 제약 많은 매개를 거치길 원하지 않았다. 이치마츠도 그 쯤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조용히 혼자 있을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부원이 자기 한 명만 남으리라곤 생각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와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카라마츠는 책을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년이었지만, 대신 이치마츠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고 감상이나 의견을 솔직히 남겨주곤 했다. 나름 친하다고 손에 꼽는 녀석들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시구나 소설의 문구도 카라마츠에겐 보여줄 수 있었다.

그것이 점심시간의 일과라면 방과 후에는, 역으로 카라마츠가 자신의 무대를 피로하는 자리가 이어지곤 했다.

이치마츠는 그다지 관심 없는 고전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이나 그에 준하는 것들을 곧잘 대사까지 통째로 외워서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법 배우답게 연기하곤 하는 모습이 꽤 그럴싸했다.

- 사실은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이 작가처럼 살고싶어”

가져온 도시락으로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며 후딱 식사를 마치고는, 이치마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에..”

카라마츠가 낡은 책을 한 손에 들고는 촤르륵 펼쳐보며 옅은 감탄사를 내뱉았다.

“특별한 사람들은 특별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다자이 오사무는 말야, 천재였어….”
“흐음”
“물론 그만큼 인정받긴 했지만…가지고 있는 실력에 비해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어. 가엾게도”

“자살하지 않았던가?”
“응?”
“그 작가, 내가 알기론….”
“맞아. 그것도 꽤 여러 번 시도했었지. 그 점도 마음에 들어…이 세상에는 채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거야”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에서 가만히 책을 빼앗아 누군가 거칠게 접어놓은, 색이 바래 누르스름한 종이를 꾹꾹 눌러 펼치며 말했다.

“시대상이라는게 있기도 하지만 말야. 어찌됐든 난 안 될거야. 내 인생은 하찮고 보잘 것 없고 평범해서 볼 거리도 없지. 특별한 일- 특별한 경험도 하나도 없고, 나라는 사람 자체도 별로이고…”
“아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다시 이치마츠의 손에서 책을 가져와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이치마츠의 인생은 보잘 것 없지 않아. 아직 그걸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온 시간도 짧다. 게다가 이치마츠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보증하지”

늘 깨끗한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곤 하는 카라마츠였다. 이치마츠는 그런 거의 말에 더 이상 일일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듣기에 나쁜말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 게다가, 그 작가처럼 살고싶다니. 좋은 작품을 쓰는 네 모습은 기대되지만 자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닮고 싶다고 해서, 그런 부분까지 몽땅 포함한 건 아니니까”
“그럼 다행이군”

‘- 아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카라마츠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방식임을 알기에, 남은 말은 혼자 씹어 삼켰다.

“오, 여기 꽤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군”
“뭔데?”

이치마츠가 카라마츠 쪽으로 잔뜩 고개를 들이밀고 들고있는 책을 살폈다. 카라마츠가 흠흠, 하고는 작게 목청을 가다듬고 굵직한 목소리의 연기톤으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연애에 빠지는 걸요. 이렇게 태어났으니. 애써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으니. 알고 싶지 않겠습니까? 둘이 어떤 것인지-“
“흐음- 좋은가? 잘 모르겠는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왠지 조금 조금 더웠다.

“좋지 않은가? 물론 이 대사를 듣는 사람이랑 끝이 별로 좋진 않겠지만…”

카라마츠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이치마츠의 얼굴 앞으로 페이지를 휙휙 넘겨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군! Power of Love!”

책을 탁 덮으며 카라마츠가 큰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이 작품에 한해서는…”

- ♪♩♬♪

 

 


점심시간을 마치는 벨이 울린다. 또 다시, 조금 특별한 일상에서 조금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튼 이치마츠, 난 네가 일찍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별 걱정을 다 한다”
“그럼 다행이고.”
“나중에 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이치마츠가 조용히 말했다. 늘 자리를 먼저 뜨는 것도 이치마츠 쪽이었다. 카라마츠는 언제나 들렀다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긴 가로수길을 돌아와 그 시작점 쯤에서 뒤를 돌아보면 카라마츠의 모습은 항상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벚꽃 향기가 코 끝을 간질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10월, 단풍이 물들고-
아직은 더위가 채 가시질 않아 반 소매와 긴 소매가 반반을 차지하는 계절.
가을이다.

 

학교가 교실이며 동아리며 문화제 준비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이치마츠 동아리실 만큼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축제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친히 마련해준 특별활동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오늘은 읽던 책도 가지고 오질 않아서.

책상에 기역자로 허리를 구부리고 누워서는 연신 하품만 해대다, 마침내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문을 잠그고 가로수 길로 향했다.

여전히 이치마츠는 단짝이라 부를만한 친구가 없었고,
카라마츠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이치마츠는 별로 바쁘지 않은가보군”

머리 위로 손을 쭉 뻗어 갈색으로 변해가는 벚나무 잎을 똑똑 따내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난 반에서도 있으나 마나고, 동아리도 알다시피”
“헤에…그거 좋군, 한가하니까 네가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잖아?”

양 손을 쫙 펼쳐 떼어낸 잎을 바닥에 흩뿌리는 의미 없는 장난을 하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별로. 심심해. 넌 어때? 요즘 바쁘지?”
“흐음-“

카라마츠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괜히 뜸을 들였다. 본인은 멋있어 보인다 생각해서 취하는 포즈같았지만, 이치마츠는 늘 그게 구리다고 생각했다. 싫은건 아니었다.

“이치마츠는 늘 특별한 경험을 하고싶어 했지. 어떤가? 이 몸이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지! 이번 연극, 내가 당당히 주연이라고”
“헤에…정말?”

정말로 놀라서 되물은 것이었다. 저런 녀석이 주연이라니. 연극부도 어지간히 인물이 없나보지.

“문화제 날, 학교에서 제일 높은곳에 있는 소강당 건물에서 하니까. 시간이 되면 와줬으면 좋겠군”
“응, 꼭 갈게”

 

고민없이 바로 이어지는 이치마츠의 대답에 카라마츠가 만족한 듯 싱긋 웃어보였다.

 

 


문화제 날이 가까워지자 생각보다 정신이 없었다.
동아리에 별다른 일이 없는게 들통난 덕분에 반에서 하는 유령 찻집인지 뭔지의 잡일에 투입됐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축제 당일, 겨우겨우 짬을 내어 교실을 빠져나온 이치마츠는, 문득 한 번도 소강당에 가본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문화제 팜플릿을 살펴보아도, 소강당을 안내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잘못 들었던 것일까?

“마츠노, 여기서 뭐해? 연극부 공연 보러 간다더니. 대강당에서 지금 벌써 시작한거 같던데”

같은반, 그나마 대화를 트고 지내는 C가 말을 걸어왔다.

“대강당? 소강당이 아니고?”
“무슨 소리야, 우리 소강당 안 쓰잖아. 저기 산 쪽으로 뻗어있는 계단 올라가면 나오는데, 그 건물 쓰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

듣고보니 그런 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래? 고마워. 나중에 봐”
“야, 어디가? 나도 대강당 갈건데- 야, 마츠노!”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는 늘 무심코 지나치던 커다란 돌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묘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리라.

 

10월의 흐린 날씨, 바람이 살짝 차가워 가만히 서있으면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치마츠에겐 오히려 조금 더운 날씨였다.

100개는 족히 돼보이는 계단을 끝까지 오르자, 평평한 공터 위로 낡아빠진 단층 건물이 하나 버티고 있었다.
방치된 지 오래인지- 음산하다기보다는, 정말이지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위험해보이는 공간이었다.

통유리로 된 현관문을 밀어보자 의외로 쉽게 열어젖혀졌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주변을 슥슥 둘러보고는 삭아서는 부러지기 직전의 빗자루를 하나 집어들었다. 안 쪽이 거미줄 투성이었다. 늘 들고다니는 마스크를 꺼내 쓰고는, 빗자루로 휘적휘적 거미줄을 해치고 안으로 향했다.

- 건물 안 쪽은.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비까지는 멀쩡했는데, 강당 문을 밀어 열자 창문이 다 깨어 부서져 빛줄기가 고스란히 들어오는 강당 곳곳이 불에 그을려 새까만 자욱만을 가득 가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있었다. 바깥쪽으로 갈수록 흔적이 약했고, 무대 쪽이 거의 다 타버려 뒤쪽 배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이 세상이라는 것이"

별안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생물 같은 기분이 들고, 나 하나만 남겨놓고 다 어디론가 가버려 불러도 소리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땅거미 지는 광야에 서있는 듯한 처참한 기분이 엄습했습니다”

“…카라마츠”

 

이상한 약속장소를 잡은 것에 대해 이치마츠가 무어라 따지기도 전에 카라마츠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꽤 오래 전에 말야, 여기서 화재가 있었다고 하더군”

카라마츠가 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부분부분 깨어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어두운 건물 안 쪽 바닥을,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했다. 카라마츠가 그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 곳은 무대가 되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동아리 활동에 목숨거는 녀석들도 많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마지막으로 서는 무대에 모든걸 건 녀석도 있었던 모양이야”

카라마츠가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바닥을 쓸어내자, 그득한 먼지와 함께 까만 재가 하얀 손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조금 치사한 수를 써서라도 말이지, 꼭 주연을 맡아보고 싶었다”
“…타이틀은 뭐였어?”

따지는 것을 포기한 이치마츠가 평소와는 다른,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질문했다.

“글쎄, 그것까진 기억이 안나. 들었던가? 아마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겠군”

카라마츠가 가볍게 받아넘기며, 이쪽 조명에서 저쪽 조명으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며 독백했다.

“무대 위 낡은 조명이 화재의 원인이었다고 하더군. 사실 극을 준비할 때부터 불안했는데- 고등학생이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쓰겠어?”

카라마츠가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연 당일날, 갑자기 조명이 떨어지고, 정확히 어떻게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막 커튼에 불이 붙었던 모양이다.”

카라마츠가 손가락으로 무대 양 옆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큰 인명 피해는 없었지. 무대 쪽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밖을 봐서 알겠지만 불길이 멀리 퍼진것도 아니고.
문제는 무대 위에 있던 사람들이었어. 우선 무대 양 옆을 지키고 있던 스탭들은 화상 때문에 꽤나 고생 했겠지. 더 안된 건 주연을 맡은 소년이었다. 머리 위로 조명이 떨어졌거든”

그러곤 잠깐 뜸을 들였다.

“그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아비규환이었으니까”

직접 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담담한 말투였다.

“카라마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있어?”

이치마츠의 물음에 카라마츠가 대답없이 조금, 소리없이 웃었다.

“글쎄”

그러고선 여느때와 같이 목을 가다듬고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했다.

“저는 지고있는 꽃잎이었습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죠.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습니다”

느닷없이 시작된 카라마츠의 독무대가, 이치마츠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그 어디에도 내가 서있을 곳이 없어 현실이 아닌 작은 나무판자 위에 정처없이 몸을 실었습니다. 그 곳에서라야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웃어주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빙 둘러 서서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도 미친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하지만 광인들은 대게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삶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고뇌하는 이 현실.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부질없이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너무나도 비참합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이치마츠와 마주 선 채 걸음을 멈추었다.

- 이치마츠가 조용히, 격양된 그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직 이치마츠만을 위해 준비된, 이치마츠밖에 볼 수 없는 무대인 것이다.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갑자기, 까닭없이 서글픈 마음이 엄습해왔다.
조용히 양 손을 들어 카라마츠의 두 손을 쥐었다. 이치마츠가 말했다.

“작가란 상당히 허영쟁이라, 자신이 남모르게 고심한 글귀에 전혀 고생하지 않은 것처럼 과시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마치 정말 대단한 사람은, 한 치의 고민도 없어야만 한다는 듯이”

“그래도 나는, 내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들만 하고싶어. 서투른 말이라도 좋아, 더듬거리면서. 내 피와 살을 깎아내어 만든 말만 하고싶어”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꽤 오랜 시간이 스치고 갔을 너를, 미처 닦이지 못했던 그 애처로움의 흔적 한 자욱까지도 아낌없이 너를 보았노라고, 보고 있노라고”

“내가 너를 보았으니, 너는 이제 되었다. 너는 가을 나비. 창밖, 정원의 검은 흙 위를 바스락바스락 날고있는 추한 너를 바라본다. 유별나게 강인하여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 결코 덧없는 모습은 아니야. 아름답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나는 사랑한다, 가을 나비를. 추하고도 아름다운 그 강인함을, 비록 덧없이 저버려 이제 곧 이별을 고할지라도”

거기까지 말하자, 정말로 카라마츠가 살짝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급히, 언뜻 자신이 안기는 듯한 자세로 카라마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런 이치마츠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카라마츠가 말을 이었다.

“매미들은 드디어 죽을날의 최후가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은, 더 행복해져도 좋았을 것입니다. 더 많이 놀아도 상관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 허락해줘, 꽃 속에서 자는 것만이라도”

둘만이 올라간 무대의 막이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싫어서, 이치마츠가 손 끝에 가득 힘을 줘보아도- 손에 쥔 옷깃이 점점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안녕,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자신의 몸에 머리를 파묻은 이치마츠를 살짝 떼어내며 말했다.

“자 이제, 이별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씩씩하게 살아가는거야”

가을의 길고 뜨거운 햇살이 만들어낸 조명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그렇게 이야기도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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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문구, 글귀, 명언 등을 가져온 부분이 굉장히 많고.

각각 실제 작가가 했던 의도나 전체 맥락을 무시한 체 단편적인 느낌만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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